• [에디터 프리즘] 김호중은 팬들에게 뭐라 말할까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김호중의 뺑소니 사고가 점입가경이다. 김호중은 지난 9일 오후 11시40분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도로에서 마주 오던 택시와 충돌한 후 현장에서 도망쳤다. 당시 매니저 A씨가 김호중의 옷을 입고 자수했고,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는 또 다른 매니저 B씨에 의해 제거됐다. 사고 후 17시간 만인 10일 오후 4시30분 경찰서를 찾은 김호중은 비로소 음주 측정을 받았다. 그는 경찰의 추궁에 운전자는 자신이었다고 자수했지만, 음주운전은 부인했다. 하지만 사고가 있기 전 김호중이 유흥주점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 뺑소니 후 거짓말로 진실 은폐 팬과 건강한 소통엔 책임감 따라 」    뺑소니 사고, 운전자 바꿔치기, 음주운전 혐의까지.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소속사 대표인 생각엔터테인먼트의 이광득 대표가 나섰다. 술집에는 갔지만 공연 준비로 김호중은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고, 매니저의 경찰 대리 출석과 차량 블랙박스 제거는 모두 아티스트를 향한 자신의 과잉보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또 김호중이 사고를 내고도 그냥 집에 가버린 것은 “공황장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고 순간부터 거짓말과 변명으로 진실을 호도하던 가수와 기획사의 괘씸한 행태는 사고 직후 11~12일 잡혀 있던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하면서 더 미움을 샀다.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그 변명으로 공황장애를 이야기한 아티스트가 태평하게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뻔뻔한 공연 강행에 기획사가 내놓을 대답은 뻔하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팬들과 지켜야 할 약속이 과연 이것뿐일까. 스타를 향한 팬덤은 단순히 그 스타가 가진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좋아하는 스타를 가족처럼 생각해 그의 건강을 바라고 행복을 바란다. 또 그가 모든 이들에게 칭찬받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팬클럽이 앞장서 스타 이름으로 기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다.   이런 팬들에게 범법 행위 후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거짓말과 변명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힘없는 매니저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채 공연을 강행한 김호중과 기획사의 행태는 과연 이해될 수 있을까. 일방적인 팬덤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성실하고 묵묵히 수줍게 스타를 응원한다. 이런 그들을 위해서라도 스타의 행동에는 진실된 책임이 따라야 한다.   범죄행위는 아니지만 지난 4월 배우 류준열을 두고 ‘그린 워싱(green+white washing·위장 환경주의)’ 논란이 번졌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 홍보대사로 ‘나는 북극곰입니다’ ‘용기 내’ 등 다수의 캠페인을 진행한 그가 유명한 골프 애호가라는 게 알려지면서다. 배우 혜리·한소희와 함께 ‘환승 연애’ 이슈가 촉발된 무대가 하와이 골프장이다. 기후위기 주범인 골프장 건설에 반대해야 할 환경운동 홍보대사가 하와이까지 가서 골프를 즐기다니. 그는 같은 달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GC에서 열린 마스터스 개막 전 ‘파3 콘테스트’에서 골프 애호가로서 선수 김주형의 일일 캐디를 맡으며 또 한 번 골프장을 밟았다.   한동안 이 논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류준열이 지난 10일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The 8 Show)’ 제작보고회에서 비로소 입을 뗐다. “골프와 관련한 비판적인 여론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데뷔 이래 가장 고민이 많은 시기인 것 같다. 개인적인 일이다 보니까 인터뷰나 개인적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게 이날 그의 말이다. 환경운동가로 이미지 메이킹해서 인기를 얻은 배우가 지인과 골프를 치는 일은 과연 개인적인 일일까. 아무튼 류준열은 이날 사과도 뭣도 아닌 얼버무림으로 또 한 번 문제를 피해 나갔다. 그가 2018년 자신의 생일날 자발적으로 모은 환경기금 500만원을 그린피스에 후원한 팬카페 올포류(All for RYU) 회원들에게는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하다.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2024.05.18 00:28

  • [에디터 프리즘] 명분과 실리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중동 정세가 살얼음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와의 전쟁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번 전쟁은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가자지구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시작되면서 긴장감은 최고조로 치솟고 있다. 하마스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뚝심이 전쟁을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은 물론 국제사회도 작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에선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전 시위가 격하게 벌어지면서 오는 11월 대선에 나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 대선판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중동의 주변국들도 이번 전쟁의 불똥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  「 미·중 갈등 속 이달 한·중·일 회의 국익 극대화 위한 전략 준비해야 」    이런 가운데 지난달 국제사회가 크게 긴장한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 군사적 충돌이다. 이스라엘이 지난달 1일 시리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을 공습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보복에 나선 이란은 같은 달 13일 300여 발의 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해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다. 이란의 이스라엘 본토 공격은 처음이었다. 19일에는 이스라엘이 이란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지켜보는 국제사회는 자칫 5차 중동전쟁으로 번질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현재까지 별다른 후속 공격은 없었다. 다행히 양국 간 충돌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두 나라는 공존이 힘들 정도의 앙숙 관계다. 이런 양국이 권투에서 스파링하듯 가볍게 잽만 몇 번 날리고 공격을 접은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 중 하나는 ‘명분과 실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실제 국제 관계에서 명분과 실리 모두를 만족스럽게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과 이란 수뇌부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가 주도하는 전시내각 입장에서 주적인 하마스 소탕을 위해 이란과의 전면전은 꼭 피해야 할 옵션인 것이다. 전선의 확대로 자칫 전쟁의 주 타깃이 분산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권부도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이 서방의 경제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상황을 악화시켜 민심 이반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둘 다 군사적 강경 대응이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것이다. 두 나라가 거창한 비난 성명에 걸맞지 않게 체면치레 수준의 공격만 했던 이유다. 전쟁을 하더라도 실리를 따져 보고 전략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처럼 국제무대에서는 명분도 국익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재평가되곤 한다. 철저한 계산에 따라 실리를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략적 선명성’을 앞세운 외교 정책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명분론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한·미 관계가 중요하다는 명분이 다른 주변 강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줘선 안된다는 의미다. 외교에서는 뭉뚱그린 명분론보다 주변 강국들과의 맨투맨 외교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를 명확히 따지는 전략의 내실이 크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외교의 정체성을 이런 관점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달 말 한·중·일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 2019년 12월 이후 4년여 만에 열리는 3국 간 다자 외교무대다. 특히 미·중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열리는 만큼 윤석열 정부에겐 아주 미묘한 자리가 될 수 있다. 좋은 기회가 될지, 서로의 간극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지는 우리가 준비한 전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작금의 국제 정치·외교의 기저에는 항상 선택적 명분과 선택적 정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2024.05.11 00:12

  • [에디터 프리즘] 1만원 로또 주택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서울 한복판에 월 임대료 1만원인 청년주택이 들어섰다. 이 주택은 입지도 좋다. 서울 동작구 지하철 7호선 신대방삼거리역 인근에 위치한다. 게다가 ‘풀 옵션’ 주택이다. 냉장고와 드럼세탁기·에어컨·전기쿡탑·레인지후드·가구장 등 일체가 포함됐다. 가구별 면적은 35㎡(약 10.6평·공급면적 기준)이다. 자그마한 원룸이지만, 청년들이 살고픈 곳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월 임대료는 단돈 1만원이다. 비결은 동작구가 직접 건립하고 운영하는 주택이어서다. 동작구 출자기관인 ‘대한민국동작주식회사’가 지역공헌 사업 일환으로 첫 선을 보였다. 동작구청 관계자는 “동작구의 지원을 받아 구에서 직접 전세를 운영하기 때문에 임대료를 직접 설정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  「 서울 한복판 1만원 주택, 36명 행운 ‘보여주기식’ 복지 세금 낭비 논란 」    입주 대상은 월평균 근로소득이 평균 50% 이하(167만6942원, 2023년 기준)인 만 19~39세 무주택자 미혼 청년이다. 입주자로 선정되면 2년간 우선 거주할 수 있고, 재계약을 통해 최대 30년까지 살 수 있다. 한마디로 최장 30년까지 거주 가능한 서울 도심의 최저가 공공주택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월세 1만원 주택이 말이 되느냐는 감탄과 놀라움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단 36명의 청년에게 돌아갈 예정이다.   파격적인 ‘1만원 임대주택’은 지방에서 먼저 시작됐다. 전남 화순군은 지난해부터 임대아파트를 전세로 빌린 뒤 월 1만원을 받고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에 재임대해준다.   임대 대상은 화순읍에 소재한 66㎡형(20평) 아파트로, 가구당 보증금 4500만원은 전액 화순군에서 지원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청년과 신혼부부 몫으로 각각 50명씩 100명을 모집했다. 올해는 청년 606명, 신혼부부 51명이 신청했다. 청년의 경우 12대 1 경쟁률이다. 흥행에 성공하다 보니 당첨자는 추첨으로 뽑는다고 한다. 전남 나주시는 아예 ‘0원 아파트’도 내놨다. 청년과 신혼부부 30가구에 보증금 전액을 지원한다.   이는 지방의 청년층 이탈과 인구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다. 실제 이들 지역에 젊은세대들이 유입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올해 화순군 1만원 주택 신청자 중 타 지역 거주자는 절반에 가까운 49%였다. 연령도 젊어졌다. 이 주택 신청자 중 29세 이하는 50%(338명), 39세 이하 39%(260명)이다. 전남 지역 자치단체들은 지방소멸대응기금 등 2843억원을 투입해 2035년까지 인구감소지역 16개 군에 1000가구 공급을 목표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서울 동작구 1만원 주택은 이러한 인구소멸지역의 사례와는 결이 다르다. 청년층을 위한 주거복지 차원에서 임대료 부담을 덜어주려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복지 포퓰리즘 논란도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복권도 아니고, 이런 보여주기식 정책 문제다”, “운 좋은 36가구 청년 홍보한다고 수백만 청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세금 낭비이고, 시장 교란이다” 등 비판 여론도 적지 않다.   당초 동작구 공공주택의 임대료는 월 13만6000원이었다. 그것도 주변 시세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1만원을 제외한 금액을 동작주식회사의 수익금으로 충당하도록 바뀌었다. 동작구청 관계자는 “입주 후 6개월 정도는 동작주식회사 수익금 3000만원 기탁금으로 운영하고, 이후에는 조례 등 제도를 마련해서 구 예산을 투입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결국 세금이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 1만원 임대주택의 홍보 효과는 상당했다. 그러나 실효성 있는 임대주택 사업인지는 의문이다. 한정된 재원이라면, 로또에 당첨된 극소수 일부에게 혜택을 몰아줄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이 돌아가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2024.05.04 00:10

  • [에디터 프리즘] ‘추적 60병’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잘못 쓴 게 아닌가 다시 봤습니다. 맞습니다. ‘추적 60병.’ 북한산으로 향하면서 만난 간판입니다. 이 주점은 일단 ‘제목’으로 먹고 들어갑니다. 그러니 지상파 방송 ‘K본부’의 시사프로그램 제목을 패러디한 사장님의 의도는 성공했습니다. 어디 ‘추적 60병’뿐입니까. ‘가구만사성(가구점)’ ‘순대렐라(순댓집)’ ‘버르장머리(미용실)’도 마찬가지로 먹고살자는 사장님들의 절실함이 묻어납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긴 불황이 만든 재기발랄의 역설”로 설명합니다. 어려움 속에도 어떻게든 손님을 잡으려는 고심의 흔적이라는 것이죠. 그 자영업자들의 한숨이 길기만 합니다.     ■  「 긴 불황이 만든 고심 어린 간판들 자영업자, 고금리·고물가 또 위기 」    소규모 유통업을 하는 정모(57)씨는 “쿠팡에다 중국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등쌀에 못 견딜 판인데 은행도, 저축은행도 대출 문턱을 높이니 막막하다”고 합니다. 지난 2월 개인사업자 대출 연체율은 0.61%. 2년 전(0.2%)과 비교하면 3배 넘게 폭등했습니다. 꽉 막힌 은행 대출을 피해 제2금융권으로 발길을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축은행 연체율은 지난해 12월 말 기준 6.55%로 2015년 12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3% 깜짝 성장했어도 체감 경기는 부진합니다. 물가상승률은 둔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1년에 3% 이상 오르고 있는 수준입니다. 지난 한 달 새 배춧값이 36%나 뛰었고, 사과는 지난해 대비 136% 올랐습니다. 게다가 서비스업의 물가 상승 압력은 거셉니다.   그래서일까요. 북한산 아래 고깃집 입간판에는 ‘삼겹살 180g 1만원’ 자리에 ‘1만2000원’이 덧써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가격이면 ‘서울에서 둘째로 싼 집’이라고 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만, 왠지 아쉽습니다. 고깃집 사장님은 “버티기 힘들다. 물가가 너무 올라 올릴 수밖에 없었다”며 “소주도 4000원에서 5000원으로 올리고 싶지만…”이라며 슬쩍 제 눈치를 봤습니다. 술값 인상은 음식·주점의 마지노선(최후 방어선)이기 때문이죠. 손님이 떨어져 나가 소비 부진의 악순환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편의점에 들러 막걸리 한 통을 샀습니다. 사장님은 얼마 전 다른 편의점 하나를 정리했답니다. 두 곳에서 나는 이익보다 비용이 더 많다면서요. 그가 말한 비용은 인건비입니다. ‘편의점 점주보다 알바(아르바이트생)가 더 번다’는 말에는 이런 상황도 포함되겠지요. 인건비는 임대료와 함께 자영업자들의 고정비용 양대 축입니다.   내년 최저임금 심의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현재 최저임금은 시간당 9860원. 최근 5년간(2020~24년) 평균 인상률은 약 3.4%입니다. 1.4%인 140원만 인상돼도 1만원을 넘게 됩니다. 자영업자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요. 그 편의점에서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청년을 내년 이맘때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장님이 인건비 줄인다며 아예 아르바이트생을 내보내고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될까요.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19.6%(무급 가족 종사자 제외)가 자영업자인 대한민국이 펼쳐집니다. 한때 37%까지 치솟았던 자영업자 비율은 차츰 떨어져 지난해 처음으로 20% 아래가 됐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5%대보다 높지만, 산업 구조 변화가 아닌 경기 부진과 고금리·고물가가 이유라면 문제입니다. 정부는 최근 대형마트·편의점에 물가 안정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반면 한국갤럽은 26일 우리 국민의 경기 전망 비관론이 한 달 새 7%포인트 올라 55%가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안갯속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다시 ‘추적 60병’이 보입니다.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당 수첩(M본부)’ ‘그것이 마시고 싶다(S본부)’라는 간판도 어디엔가 있을까요.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2024.04.27 00:10

  • [에디터 프리즘] 약으로 만든 몸

    정영재 문화스포츠 에디터 우리 회사 근처 피트니스센터에는 ‘명예의 전당’이 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멋진 몸매를 만든 남녀 회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올해의 운동 1차 목표인 ‘제주국제트레일러닝 대회 36㎞ 완주’를 달성한 터라 ‘이제부터 몸만들기에 주력해 가을쯤엔 보디 프로필 찍기에 도전해 볼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들린 날벼락 소식. 대한체육회가 10월 열리는 전국체전에 보디빌딩 일반부를 없애고 고등부만 남기겠다는 것이다. 보디빌딩계의 고질인 도핑 문제가 또 터진 거다. 체육회 실무자는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일반부 보디빌딩 선수가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이 검출됐다. 2018년 체육회에서 의결한 보디빌딩 종목에 대한 제재 조치를 시행할 수밖에 없다. 올해 체전에서는 입시가 걸린 고등부만 유지하고 일반부는 없애기로 했다”고 밝혔다.     ■  「 보디빌딩 또 도핑, 체전 퇴출 위기 동호인도 노출 위험, 확산 막아야 」    보디빌딩은 ‘상습 도핑 종목’이었다. 참다못한 체육회는 2018년 1월, 향후 체전 보디빌딩 도핑 적발 시 단계별 제재 조치를 의결했다. 1차 적발 시 시범종목 전환, 2차는 일반부 폐지, 3차는 종목 폐지다. 2018년 체전에서 1건이 적발돼 2019년부터 보디빌딩은 정식종목에서 시범종목으로 격하됐다. 대한보디빌딩협회(대보협)와 보디빌딩인들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지난해 정식종목으로 복귀했는데, 또다시 한 건이 터진 것이다.   도핑이 적발된 선수 A는 자격정지 4년을 받았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에 항소를 제기했지만 결과가 뒤집힐 확률은 낮다. 대한체육회는 항소 결과가 나온 뒤 이사회를 열어 제재를 확정하기로 했다. 체전에서 종목이 없어지면 실업팀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전국 16개 실업팀에 소속된 140여 명의 보디빌딩 선수가 또다시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대보협 임원 B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2018년에 보디빌딩 선수와 지도자 전원이 서명한 각서를 제출했어요. 그러니 제재를 내린다 해도 할 말은 없죠. 대보협의 지속적인 교육과 감시로 도핑이 근절되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던 차에 이런 일이 터지니 멘붕이네요.”   실제로 대보협은 협회 주관 대회에서 지나치게 크고 선명한 근육을 강조해 약물 유혹에 취약한 기존 종목을 축소하고, 피지크나 클래식 같이 자연스러운 근육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종목을 확대하고 있다. 출전 선수 전원을 대상으로 약물의 위험성과 적발 시 강력한 처벌에 대한 교육도 했다. 그럼에도 선수 개개인의 일탈은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협회의 하소연이다. 선수들도 “한 명의 도핑으로 다른 모든 선수들이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는 건 억울하다”고 선처를 호소한다.   도핑 확산 방지에 대한 대한체육회의 입장은 단호하다. 체육회 실무자 C는 “약물로 몸을 만들어 입상한 선수가 커다랗게 사진과 입상 경력을 내걸고 센터를 운영한다. 이를 보고 찾아온 회원에게 뭘 가르치겠나. 도핑이 엘리트 선수에게서 동호인이나 아마추어로 흘러가는 물길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보협 임원 D도 이렇게 말했다. “짧은 시간에 몸을 만들었다는 일부 연예인, 3~6개월 안에 보디 프로필 찍겠다는 사람들이 약물에 쉽게 노출된다. 단백질 보조제 등 국내에서 출시되는 제품은 성분 표시가 정확하고, 식약처의 관리를 받는다. 문제는 해외 직구 제품이다. 성분을 알기도 어렵고 어느 정도 유해한지, 중독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대보협이 도핑의 기준, 금지약물의 유해성 등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확산을 차단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다시, 명예의 전당에 걸린 사진을 본다. 저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걸 참았을까. 얼마나 긴 시간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저 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도핑은 근절돼야 한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2024.04.20 00:10

  • [에디터 프리즘] 알리깡과 테무깡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경쟁사보다 100원이라도 더 싸야 한다. 이는 이커머스가 가진 태생적 숙명이다. 실시간 가격 비교가 힘든 오프라인 쇼핑몰과 달리 온라인 쇼핑몰은 가격이 더 저렴한 곳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이 있고, 이커머스 자체적으로 ‘최저가격’ 순으로 상품을 노출하기도 한다.   똑같은 제품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100원이라도 더 싼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커머스 내 상점 격인 판매자(셀러)들은 그래서 ‘최저가’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이커머스가 빠르게 한국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는 이유도 가격에 있다. 알리익스프레스(알리)·테무·쉬인과 같은 중국의 이커머스(C커머스)는 최저가를 넘어 ‘초저가’ 전략으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  「 소비자 피해, 유통 생태계 교란 규제 풀어 산업 경쟁력 제고해야 」    소비자 입장에서는 국내 판매가격 대비 절반 수준인 상품이 수두룩하니 피할 이유가 없다. 특히 젊은 소비층 사이에서 인기다.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테무깡’ ‘알리깡’ 같은 신조어가 자주 올라오는데, 이는 C커머스에서 산 초저가 상품의 택배 상자를 개봉하는 영상 콘텐트다. 클릭 뷰와 구독자 수가 금방 늘어나 마치 ‘카드깡’ 하듯 수입을 쉽게 올릴 수 있다고 해서 ‘깡’으로 불린다.   C커머스에서 산 물건을 중고로 되파는 일도 흔하다. 무료 배송 금액을 채우기 위해 이미 있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산 뒤 중고거래 앱에서 파는 식이다. 그래도 남는 장사라는 후기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내 판매가의 절반 가격이니, 중고로 되팔아도 손해가 아니라는 얘기다. 심지어 각종 할인 마케팅을 활용하면 중고로 되팔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글도 올라온다.   이래저래 고물가에 시름 하는 소비자에게는 나쁠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C커머스가 이렇게 한국시장을 잠식할 동안 국내 소비자 피해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C커머스를 비롯해 해외 이커머스를 통해 물품을 샀다가 피해를 본 상담 건수는 1만1789건으로, 2022년보다 68.9% 급증했다. 특히 C커머스의 선두 주자 알리 상담 건수는 2022년 228건에서 지난해 673건으로 3배 넘게 늘었다.   이 가운데 구제 사례는 겨우 30건이다. 방치가 아니라 버려진 수준이다. 불량이 배송되거나, 배송 도중 파손되는 일이 흔하고 환불하기도 까다롭다. 1000원대의 생활용품이거나 저가 상품이라면 환불보다는 버리고 새로 사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 도를 넘는 광고·마케팅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테무의 ‘친구 초대 이벤트’는 마치 다단계와 유사한데, 테무는 이 같은 마케팅으로 2월에만 한국에서 581만 명을 모았다고 한다.   유통 생태계 교란도 심각한 수준이다. 저렴한 중국 제품에 대한 접촉 빈도가 높아지면 국내 제조사 제품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6조원에 달하는 해외 직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물품이 의류·패션 관련 상품(3조905억원, 45.7%)이었는데, 이는 곧 국내 의류·신발·잡화 등을 제조해 판매하는 국내 중소기업에 타격을 입혔다. 인터넷 통신판매업계는 이미 줄폐업이 이어지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인터넷 통신판매 업체는 7만8580곳으로, 집계 이래 최대치였다.   C커머스가 보여주고 있듯 쇼핑에는 이제 국경이 무의미해졌다. 가격이 싸고 서비스가 좋은 곳에 몰리는 소비자를 탓할 수도 없다. 현명한 소비자를 붙잡으려면 국내 유통 생태계가 C커머스 등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체력을 갖춰야 한다. 정부 보호 아래 가격이나 품질, 서비스 개선에 소홀했다면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물론, 역차별 해소 등을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 하지만 C커머스에 대한 규제보다는 불필요한 규제를 풀어 기업이나 유통 생태계가 체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2024.04.13 00:10

  • [에디터 프리즘] 국수집 음악에도 T.P.O가 필요해

    서정민 중앙SUNDAY 문화선임기자 얼마 전 강남의 한 유명 국수집에 들렀을 때다. 여느 평범한 국수집과 달리 모던한 인테리어가 세련돼 보이는 매장에선 실내 음악으로 국내 모 여가수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 노래가 대략난감이었다. TV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험난한 사랑을 표현하는 OST로 깔린다면 딱 좋을, 그러니까 창법이나 목소리가 꽤나 애절하게 끓는 곡이다. 산뜻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할 국수집에서 듣고 있자니 귀에 거슬렸다. 볼륨은 또 왜 그렇게 큰 건지. 이 곡을 실내 음악으로 선택한 젊은 직원들에게는 일하면서도 계속 듣고 싶은 핫한 노래소리겠지만, 국수 가락 넘길 때마다 귀와 머리가 띵해지는 손님에게는 그저 소음일 뿐. 만약 그때 “저기요, 웬만하면 T.P.O(시간·장소·상황)에 맞는 음악을 틀어주세요”라고 했다면 직원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  「 공간마다 어울리는 음악·볼륨 달라 배려 없이 키운 욕심이 논쟁 원인 」    패션에서 T.P.O에 맞는 옷차림은 어느 정도 공유된 에티켓이다. 상가나 결혼식장에 등산복 바지를 입고 나타난다면 질타 받아 마땅하다는 데 누구나 공감한다. 그런데 공간에 어울리는 음악과 데시벨(소음 단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래 전 한 남성 패션잡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도산공원, 한강둔치, 올림픽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야외공간의 현장 소음 레벨을 측정해 조용히 산보를 즐기거나 데이트 하기 좋은 장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패션 뿐 아니라 공간에도 T.P.O에 맞는 음악과 데시벨이 필요하다. 백화점과 예식장, 도서관과 시장, 식당과 게임장의 목적·콘텐트·고객은 다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일제히 열어젖힌 쇼핑 공간들의 무자비한 음악 소리가 거리로 넘쳐 흠칫 놀랄 때가 많다. 쇼핑을 하라는 건지, 어서 나가라는 건지. 요즘 젊은이들의 음악 취향을 잘 모르는 꼰대의 불만이라 하지 마시라. 쇼핑하러 들어왔다가 음악 데시벨에 놀라 매장을 나가는 젊은 친구들도 여럿 봤다.   요즘 같은 때 공간 마케팅에서 필요한 것은 고객을 위한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접대)’다. 좋은 서비스 콘텐트는 물론이고 이 공간에서 고객이 듣고 싶은 음악은 뭘까, 고민하지 않는 주인은 고객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여전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갑론을박하고 있는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문제도 서로의 배려심 부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온 식당을 뛰어다녀도 아랑곳 않고 자기들 먹는 데만 급급해 아이를 제지하거나 타이르지 않는 무심한 부모들이 있다. 이들은 모처럼 기분 전환을 위해 혹은 뭔가 특별한 이유로 그 식당을 찾은 다른 손님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 이야기를 듣지 않고, 제 이야기만 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서로 제 이야기만 하려니 목에 핏발이 서고 말소리는 계속 커질 수밖에. 한술 더 떠서 ‘못된’ 시니어들은 종업원들에게 반말까지 하며 막 대한다. 이들은 그 공간에서 일하는 이들과 옆자리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2008년 출판된 시집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 가는 길』은 불문학자·번역가인 김화영 교수가 선운사와 관련된 현대시와 한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중 김소연 시인의 시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선운사에 상사화를 보러 갔다’가 있다.   시인은 꽃이 지고 잎이 나는 소리를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고 했다. 선운사 가는 길은 꽃이 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야 한다. 그게 그 공간을 찾은 이들이 바라는 바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발자국 소리조차 조심조심 배려하는 마음은 도시의 공간들에서도 필요하다.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2024.04.06 00:10

  • [에디터 프리즘] 헤드업 정치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지금 나의 마음은 4월의 꿀벌 같아요.”   신데렐라는 오페라에서도 단골 소재로 꼽힌다.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널리 알려진 마스네의 ‘상드리용(Cendrillon)’과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La Cenerentola)’가 대표적이다. 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 신데렐라를 뜻하는 이들 오페라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곡 중 하나는 왕자로 변장한 시종이 부르는 흥겨운 노래다.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거리로 나선 그는 신붓감을 고르는 행복한 심정을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달콤한 꽃봉오리를 찾는 4월의 꿀벌에 비유하고 있다.     ■  「 골프와 정치는 고개 드는 순간 필패 겸손 잃지 않아야 유혹 참을 수 있어 」    한국인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오페라 중 하나인 푸치니의 ‘라보엠’에서 가난한 여주인공 미미는 추운 겨울밤 하나 남은 촛불이 꺼지자 이웃 로돌포에게 불을 얻으러 간 자리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옥탑방 건너 저 조그만 방에서 저는 늘 홀로 외로이 지내요. 하지만 봄이 오면 햇살이 가장 처음 비치는 곳이 바로 제 방이죠. 4월의 햇살은 첫 키스처럼 항상 제게 먼저 다가온답니다.” 유명한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가 끝난 뒤 두 주인공은 비록 가난하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4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망과 설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선 ‘잔인한 달’이란 이미지가 굳어진 지 오래다. 무엇보다 T S 엘리엇의 영향이 크다. 그의 대표작 ‘황무지’의 맨 첫 줄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실제 현대사적으로도 4·3사건, 4·19혁명에 세월호 참사까지 4월에 질곡의 역사가 반복되곤 했다. 이에 더해 최근엔 황사와 미세먼지의 습격도 4월에 집중되면서 엘리엇의 비유처럼 적어도 한국에선 4월이 그 어느 달보다 잔인했던 게 현실이었다.   정치적으로도 4월은 격변의 달이었다. 여야 정치권의 운명이 걸린 총선이 실시된다는 점에서다. 공직선거법 제34조는 국회의원 선거일을 임기 만료일(5월 29일) 전 50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로 규정하고 있다. 올해 22대 총선이 다음달 10일 치러지는 것도 이에 근거한다. 이번 총선도 이제 열하루 남은 셈이다. 어렴풋이나마 판세가 드러나고 있다 해도 결과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불과 10일 사이에도 천지개벽할 만한 사건이 속출했던 게 한국 총선의 역사였다. 방심하는 순간 뒤처진다, 얼마든지 단번에 역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번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다.   막판 관전 포인트로 여러 이슈가 거론되지만 역대 총선의 승패를 가른 숨겨진, 하지만 결정적 변수 중 하나는 “누가 ‘헤드업 정치’의 유혹을 끝까지 참아낼 수 있느냐. 누가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느냐”였음을 여야 모두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터다. 자고로 골프와 정치는 고개를 드는 순간 영락없이 OB가 나는 게 진리다. 아무리 폼이 좋고 힘이 세더라도 공을 치는 ‘바로’ 그 순간 공을 보지 않고 미리 고개를 들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더욱이 선거 종반전엔 다시 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멀리건은 언감생심. 벌타는 만회할 시간조차 없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존 헤네시 전 스탠퍼드대 총장은 『Leading Matters』에서 리더가 갖춰야 할 10가지 덕목 중 첫째로 겸손함을 꼽았다. 지도자는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한 단계 더 성장한다면서다. 과연 오는 4월은 어느 당에 달콤한 달, 또 어느 당에 잔인한 달이 될 것인가. 중요한 건 가식이 아닌, 진정 마음속 겸손함을 유지할 때 헤드업의 유혹을 참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권자들은 이슈 자체가 아니라 이슈를 다루는 태도를 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쳐들지 않는 겸손한 태도. 이게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는 가장 큰 힘이다.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2024.03.30 00:10

  • [에디터 프리즘] 한국과 미국 정치는 닮은 꼴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지난달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3’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 성숙도는 전 세계 167개국 중 22위였다. 8.09점을 받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군(8점 이상)’에 포함됐다. 아시아에선 대만(8.92점·10위)과 일본(8.40점·16위)의 뒤를 이었다. 세계 최강 미국(7.85점)은 29위를 차지했다. 8점을 넘지 못해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군(6~8점)’에 속했다. 분류된 집단은 달랐지만 한·미 양국의 순위 차는 불과 7단계였다. 한때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이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였다.     ■  「 이분법적 분열정치 국민 신뢰 잃어 정치개혁 요구 목소리에 응답해야 」    실제 양국 정치판의 현주소를 보면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두 나라는 현재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다음달 10일 총선을 치를 예정이고, 미국에선 오는 11월 5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정치 문화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더욱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첫째, 정치인들이 국민을 극단적인 양극으로 분열시키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선 지금 상대를 악으로 보는 마니교적 이분법이 정치판을 휩쓸고 있으며 이 같은 대립 정치가 국민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다.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불렸던 명성이 무색하게 미국에서도 반이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종차별 갈등이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둘째, 비이성적,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극렬 지지자들이 정치 세력화했다. 우리에게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가 있듯이, 미국에도 트럼프의 극렬지지자인 트럼피스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양국 모두에서 팬덤형 집단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법 질서를 존중하지 않는 정치가 판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총선에 후보로 나서고 있다. 당선되더라도 최종심에서 유죄를 받을 경우 자리를 내놔야 하는데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위법적인 정치행위 사례는 지난 2021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폭동이 대표적이다. 특히 트럼프는 당시 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폭동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 이는 선진 민주주의의 원조국 중 하나인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었다.   넷째, 유력 정치인의 사법 리스크가 선거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총선에 영향을 미치듯, 트럼프에 대한 형사 기소도 미국 대선에선 돌발 변수다. 이 대표는 현재 대장동 개발 특혜의혹 등과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고, 트럼프는 내란 선동 혐의 등으로 연방 특검에 의해 기소된 상태다.   다섯째, 여야의 대표 정치인들이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대선 득표율(48%)보다 훨씬 낮은 30%대에 머물고 있으며, 이재명 대표도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인기가 높지 않다. 이번 미국 대선도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불린다. 로이터·입소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7%가 “차악 후보를 선택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바이든과 트럼프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덜 싫어하는 후보를 뽑겠다는 의미다.   이처럼 양국 정치판의 분위기가 판박이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이 미국 정치의 수준을 따라간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 퇴보해 한국과 키 높이를 맞춘 것일까. 확실한 답변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한때 본받아야 할 1순위였던 미국과 대등해졌다고 자랑스러워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들 중에는 우리 정치에 대해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진정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폭발하고 있다. 지금 정치인들에게 냉철한 자기성찰은 물론 타산지석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2024.03.23 00:10

  • [에디터 프리즘] 우간다 트라우마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도대체 우간다의 금융산업이 어떻길래 우리보다 낫다는 건지 제가 직접 가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2015년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 ‘한국 금융의 경쟁력을 아프리카 우간다와 비교’하는 지적에 한탄하며 던진 말이다. 이는 한국 금융의 낙후성을 얘기할 때 상징적으로 회자하곤 한다. 그해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간다의 금융시장 성숙도가 140개 국가 가운데 81등인데, 우리나라는 87등이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으면서 불거졌다. 기업인(CEO)들 대상 설문을 바탕으로 한 이 평가에서, 삼성전자·현대차와 같은 글로벌 기업에 비해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인 국내 금융산업에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가 주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여론은 ‘금융업의 삼성전자’를 만들어야 한다며 혁신론이 들끓었다.     ■  「 DLF→ELS, 반복은 이제 그만 금융 윤리·투자 인식 개선해야 」    그로부터 4년 뒤인 2019년 “한국의 금융산업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자조 섞인 평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생결합펀드(DLF) 사태가 발생하면서다. 당시 김동원 전 고려대 초빙교수는 한 심포지엄에서 “대규모 원금 손실 사태를 일으킨 DLF 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한 시절로 회귀했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2019년 8월 DLF의 총 판매 금액은 7950억원. 피해자만 3600명이 넘었다. DLF는 독일·영국·미국의 채권금리 등을 기초자산으로, 장단기 금리 차가 일정 수준(60%) 이상을 유지하면 수익을 내지만 금리 차가 급격히 줄면 손실을 보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해 전세계 채권 금리가 급락해 대규모 손실 사태를 불러왔다. 운영 과정에서 불법적인 돌려막기 등으로 피해는 더 커졌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손해액의 40~80%를 배상하도록 하는 분쟁조정 기준안을 내놨으나, 은행과 피해자들의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2024년.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대규모 손실로 금융권이 다시 휘청거린다. 판매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18조8000억원. DLF 사태 때보다 20배 이상 규모가 크다. 당국이 부랴부랴 조정에 나섰지만 투자자와 금융권 모두 분통을 터트리는 모양새다. 분쟁조정 기준안에 따르면 불완전판매 여부에 따라 기본 배상 비율 20~40%를 적용하며, 사례별로 최대 45%포인트까지 배상 비율을 높이기로 했다. 업계는 주로 40% 수준에서 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번 ELS 사태는 ‘시장리스크’에서 비롯됐다. 만기(3년) 안에 홍콩 H지수가 반 토막 나지 않는다면 수익을 얻는 구조인데, 미·중 분쟁으로 시장이 급변했다. H지수는 2021년 2월 1만2229포인트에서 지난 2월말 5678포인트로 급락했다. 투자자들은 “예금처럼 안전한 상품인 것처럼 설명했다”며 손실의 100%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금융권은 “투자의 자기 책임을 훼손하며 판매사에 책임을 과도하게 전가하고 있다”며 난색을 표한다. 일부 불완전판매가 확인됐지만, 금융사들이 강화된 금융소비자보호법 등에 따라 대부분 절차를 준수했음에도 판매 자체가 ‘죄’로 몰리는 상황에 우려를 나타낸다. 당국의 배상 압박은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적잖다.   홍콩 ELS의 경우 불법 운용이 문제됐던 DLF 사태와는 출발점이 다르다. 그럼에도 “규정에 따르는 것과 윤리를 지키는 것은 현저히 다른 일로, 금융업계 스스로 윤리와 내부통제를 통해 고객과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김동원 전 교수)는 지적은 그때나 지금이나 되새겨들을 부분이 있다. “투자 상품이지만, 손실 가능성을 몰랐다”는 미성숙한 투자 문화도 뼈아프다. 은행권에 ELS 판매를 허가한 당국이 은행의 고위험상품 판매 책임을 압박하는 것도 모순적이다. 뒤늦게 고치는 ‘울타리’일지라도, 이번에는 ‘금융 후진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대로 된 자성과 개선이 뒤따르길 기대해본다.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2024.03.16 00:23

  • [에디터 프리즘] 1등을 1등이라 부르지 말라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가끔 원로 체육인 댁을 방문하면 빛바랜 메달과 트로피, 상장 등을 전시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반짝이던 금메달은 시커멓게 변색돼 있고, 상장도 곰팡이가 슬어 보기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이분들은 ‘옛 영화’의 상징을 애지중지 아낀다.   나도 학생 시절에 ‘백일장’이라 불리는 글짓기대회만큼은 휩쓸고 다녔다. 그때 받은 상장들을 아흔이 넘은 부친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다. 이처럼 상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주고, 세월이 지나서도 은은한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상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  「 축구협회 초등대회 순위·시상 없애 ‘즐기는 축구’ ‘동기부여’ 사이 숙고를 」    그런데 상을 주기는커녕 ‘1등을 1등이라 부르지 말라’는 곳이 있다.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초등부 대회다. 초등부는 조별예선을 거쳐 각 조 1위는 1위끼리, 2위는 2위끼리 다시 리그전을 펼친다. 월드컵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회가 조별예선에서 올라온 팀끼리 토너먼트로 대결해 우승 팀을 가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조 1위끼리 모인 리그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팀이 사실상 우승이지만 시상식도, 트로피도, 상장도 없다. 그러니 피 말리는 승부도, 우승의 환희도, 준우승의 아쉬움도 없다. 득점왕이나 MVP 같은 개인상도 없다. 마지막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조용히 짐을 싸서 대회장을 떠난다.   축구협회는 ‘즐기는 축구’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순위를 가리고 시상을 하면 승부에 집착해서 즐기는 축구를 할 수 없다는 거다. 특정 선수를 혹사하는 것도, 심판에게 과도하게 항의하는 것도, 창의적이고 과감한 플레이를 못 하게 하는 것도, 모두 ‘순위와 시상’에 목 매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김진항 축구협회 대회운영본부장은 “축구 선진국에서는 초등부 시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기량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대회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현장 지도자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모든 스포츠에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있고, 남보다 더 열심히 운동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칭찬하고 상을 줘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이기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일진대, 잘해도 상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지 답답하다고 한다.   서울 신정초 축구부(신정FC로 바뀜)에서 전국대회 100회 이상 우승하고, 조현우·문선민·홍현석 등 국가대표를 다수 키워낸 함상헌 감독은 “축구를 취미로 즐기는 아이가 있고, 선수의 꿈을 품고 정진하는 아이도 있다. 일방적인 시상 폐지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단견이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초등부 경기 심판을 2명에서 1명으로 줄인 것도 지적했다. “협회는 경기 수를 늘리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는데, 현장에서는 숱한 오심으로 인해 분위기가 엉망이다. 심판의 명백한 오심으로 골을 먹고 경기에 지는데 어떻게 ‘즐기는 축구’를 할 수 있겠나.”   김종윤 축구협회 대회운영팀장은 “아이들은 트로피가 없어도 행복하게 축구 할 수 있다. 인구 1000만인 벨기에가 FIFA 랭킹 1위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덕분이다. 어른들이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아도 ‘즐기는 축구’는 뿌리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 옳을까. 보기 나름이고, 입장에 따라 편이 갈릴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며 탄식하는 건 홍길동 한 명이면 충분하다. 1등을 1등이라 불러주고, 마음껏 축하해 주면서도 경기가 과열되지 않고 심판이 존중받는 대회. 아이들이 축구를 즐기면서도 뛰어난 선수로 성장하는 환경.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마음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 설계해야 할 모델이 아닐까. 축구협회가 “1년에 한두 대회는 시상을 하는 쪽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2024.03.09 00:10

  • [에디터 프리즘] ‘파묘’와 쇠말뚝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영화 ‘파묘’는 우리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승전, 쇠말뚝일까요. 장재현 감독은 “풍수사들과 땅을 얘기하다가 보면 결국 쇠침에 다다랐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쇠말뚝’, 그리고 작은 글씨로 옆에 한자 ‘鐵針(철침)’으로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영화는 ‘일제의 쇠말뚝 박기’를 모티브로 합니다. 일제가 혈(穴)자리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풍수침략’이라고 부릅니다.   일제 쇠말뚝 뽑기 운동이 크게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딱히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정도입니다. 1995년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가 심은 쇠말뚝을 대대적으로 뽑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쇠말뚝 뽑기가 정부 주도로 바뀐 겁니다. 당시 민간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는 ‘1985년 북한산 백운대에서 길이 40㎝, 직경 3㎝의 쇠말뚝 22개를 뽑았고, 93년 9월에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2개를 제거했다’는 성과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  「 “일제의 쇠말뚝, 민족정기 압살 의도” 영화 모티브지만 현재도 진위 논란 」    쇠말뚝으로 민족정기를 누르려 했다는 기사는 200여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정조실록 1797년 6월 24일 첫 번째 기사입니다. 정조는 인재가 없음을 걱정하며 “명나라 초기(고려 공민왕 19년)에 (명나라) 도사 서사호가 단천(함경남도) 현덕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장 오래된 ‘쇠말뚝 침략론’이라고 알려졌습니다.   1995년에 기세를 탔던 ‘풍수 침략론’은 ‘토지 측량론’에 부닥쳤습니다. 일본은 1895년 200명 넘는 측량사를 보내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삼각측량을 시작합니다. 일본은 정작 본토 측량은 소홀히 하고 한국·대만·만주 등에서는 열을 올릴 정도로 측량은 침략의 필수조건이었습니다(한국지적학회지). 쇠말뚝이 발견된 지점을 보면 이런 ‘삼각측량’을 위해 표시목으로 박은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게 ‘토지 측량론자’들의 주장입니다. 한 시사잡지엔 “측량을 위해 산 정상 등에 삼각점을 설치했다”는 당시 측량 기사의 증언도 나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기제인지, 영화 ‘파묘’에서 이렇게 대화가 짧게 오갑니다. “(쇠말뚝은) 토지측량용이라고 했잖아. 99%가 가짜잖아.”(영근-유해진) “그럼 1%는?”(상덕-최민식)   영화 속 최민식과 유해진은 쇠말뚝을 찾습니다. 북위 38.3417도, 동경 128.3189도입니다. 한반도의 허리이자, 휴전선에 막혀 남쪽에서 갈 수 있는 백두대간의 최북단입니다. 현행 교과서대로라면, 태백산맥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태백산맥·소백산맥·차령산맥 등 산맥 이름은 20세기 초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지질학 상으로 분류해 붙였습니다. 줄기 상으로 분류한 대간·정맥 등과 다릅니다. 우리 풍수는 이 줄기에 정기가 서려 있다고 봅니다.   정말 쇠말뚝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혈’에 박혔을까요. 아니면 구석구석 침탈을 하기 위한 측량용이었을까요. 한 풍수지리학자는 “쇠말뚝이 문제라면, 현재 산속의 송전탑과 전봇대는 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다른 학자는 “뽑았다고 하는 일제의 쇠말뚝 길이가 1m가 채 되지 않는데, 혈맥을 누르려면 2m 정도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묘’는 연휴가 지나면 관객 500만 명에 근접할 것으로 보입니다. 장재현 감독은 “반일은 안 도드라지게 하려 했다”고 밝혔지만, 역풍도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은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3·1절이 다시 지났습니다. 좋든 싫든, 크든 작든 일본의 그림자가 아직도 어른거립니다.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2024.03.02 00:10

  • [에디터 프리즘] 일본이 저런 나라였나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일본이 저런 나라였나.’ 최근 일본 관련 뉴스만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혼잣말이다. 엔화 가치가 연일 하락해 일본 경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상황이 확 바뀌었다. 걱정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부러움만 가득하다.   일본 증시의 대표 주자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22일 3만9098.68로 장을 마감했다. ‘버블(거품) 경제’ 시기인 1989년 12월 29일(3만8915.87) 이후 34년 2개월여 만에 최고치다. 엔화 약세로 실적이 좋아진 수출 기업과 반도체주가 지수 상승을 견인하고 있다. 하지만 닛케이지수의 최근 상승세는 단순히 인공지능(AI)과 같은 개별 호재로 관련 기업의 주가가 튀어 오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  「 닛케이 사상 최고치 경신 TSMC 공장 밤새워 공사 」    전반적으로 일본 증시에 거센 투자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게걸음을 하고 있는 한국 증시를 보고 있으면 부러울 따름이다. 단기간 주가가 급등하면서 ‘거품’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역대급 상승세, 외국인 투자 증가는 결국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이 그만큼 단단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러움의 대상은 사상 최고치인 지수나,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이 아니다.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TSMC는 최근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제조공장을 준공했다. 착공부터 준공까지 단 22개월이 걸렸다. 공장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인 클린룸만 4만5000㎡로 일본 프로야구 경기장인 도쿄돔 면적과 맞먹는다. 당초 공사기간도 5년이었지만, ‘반도체 산업 재건’이라는 목표를 내건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365일 24시간 공사를 진행했다.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속도다.   닛케이지수 상승 바탕에도 정부의 발 빠른 판단과 확실한 정책 지원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엔저 현상 속에 외국인 투자자가 늘어날 기미를 보이자, 지난해 3월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 대비 자기자본 비율) 1배 이하의 저평가된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개선안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상장 폐지까지 거론하며 적극적으로 기업을 자극했고, 기업은 지난해에만 9조6000억엔(약 86조원)에 달하는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화답했다. 정부가 방향성을 정해주자 기업이 주주환원을 통해 적극적으로 투자자 ‘유치’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최근 닛케이지수 상승세의 원동력이다.   이런 일본 정부의 행보에 비하면 한국 정부는 존재감이 없다. 상황 판단을 통해 목표를 정했으면 국회를 설득해 일본처럼 확실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근래 그런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 정책으로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만 해도 그렇다.   일찌감치(?) 반도체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는 2019년 2월 용인에 반도체클러스터를 조성키로 했지만 각종 환경영향평가, 용수·전력 확보 방안을 놓고 지방정부와 환경단체 등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착공이 3년가량 지연됐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최근까지도 각종 민원, 잡음에 시달려야 했고 여전히 기초공사 중이다. 반면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은 계획 발표 6개월 만에 착공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우리를 비롯해 많은 나라가 일본을 비웃곤 했다. 당시 일본 의료기관은 코로나19 확진자로 판명되면 의사가 손으로 감염자 발생신고서를 쓴 뒤 팩스로 보건소에 보냈다. 보건소에선 팩스에 적힌 데이터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집계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많고 조치가 늦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에 ‘일본이 저런 나라였나’라는 의아함이 들었는데, 2년여 지난 지금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2024.02.24 00:10

  • [에디터 프리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위르겐 클린스만 축구대표팀 감독이 결국 경질됐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던 대표팀이 아시안컵 4강에서 ‘유효 슈팅 0개’라는 졸전 끝에 탈락한 뒤 각계의 해임 요구가 빗발친 결과다. 커뮤니티도 들끓었는데, 팬들의 큰 공감을 얻은 글 중 하나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한 줄짜리 촌평이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지만 감독으론 실패를 거듭했던 이유가 무전략·무전술에 지도력 부재 탓이란 게 중론이었음에도 “이번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애당초 무리였다는 비판이다.     ■  「 요지부동 정치권에 설 민심도 냉랭 변화 이끄는 건 결국 유권자들의 몫 」    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꺼리는 존재였다. 학계에서도 변화는 그 자체가 뇌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선사 이래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적·육체적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체계를 지향해 왔다는 얘기다. 따라서 변하기 위해서는 이런 본능적 DNA를 뛰어넘고 뇌의 저항도 극복해야만 했다. 꼭 필요한 변화가 아니면 굳이 시도하지 않는 게 비문명 시대의 나약한 존재였던 인간에겐 최상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새해를 맞아 운동·금주·다이어트를 결심해도 작심삼일에 그치기 쉬운 건 이처럼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오랜 속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인간관계 속에서 ‘변한다’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는 것도 변화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사람이 변했어”라는 말이 나빠졌다는 의미로 통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반면 좋은 뜻이 담길 땐 ‘바뀌다’는 표현이 주로 쓰인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뭔가 바꿔봐야 하지 않겠나”는 식이다. 문제는 나쁜 쪽으론 쉽게 변하면서도 좋은 쪽으론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게 인간 세상의 경험칙이란 점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유아독존에 고집불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좀 바뀌려나 싶은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변하지 않기로는 정치인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4월 총선을 앞두고 “이젠 정치권도 바뀌어야 할 때”라는 요구가 비등한 상황에서 설 연휴 밥상 민심에 정가의 이목이 쏠렸지만 용산이든, 여의도든 요지부동 정치권에 설 민심도 냉랭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유권자들과 끊임없이 주파수를 맞추고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언감생심.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며 ‘사즉생’의 용기를 내긴커녕 한 줌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불행히도 4년 전과 다를 게 없다는 혹평만 줄을 잇고 있는 형국이다.   왜 정치인들은 변하려 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인간의 본능이 그렇다 해도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오히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 아닌가. 그럼에도 이토록 변화를 거부하는 건 무엇보다 “나만 옳다”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굳이 변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30% 지지층만 굳건하면 지금의 권력을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그런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더 치명적인 건 공감 능력마저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기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출 의지조차 없다 보니 바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당나라 재상 위징은 “군주가 영명한 것은 널리 듣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것은 편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널리 들어야 뭘 바꾸고 어떻게 변해야 할지 알 수 있다는 조언이건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에겐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니 심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투표라는 유권자 제1의 권리를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변해야 살고 바꿔야 승리한다’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해야 할 때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결국 우리 유권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2024.02.17 00:06

  • [에디터 프리즘] 2030만 패션이 필요한 건 아냐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지난 1일 ‘2024 F/W 서울패션위크’가 시작됐다. 매년 두 차례 4~5일간 열리는 서울패션위크는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한발 앞서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패션 행사다. 행사 주관을 맡은 서울시는 세계 4대 패션위크(뉴욕·파리·밀라노·런던)에 이어 5대 패션위크로 발돋움 하겠다는 목표로 올해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8개 의류·신발·가방·주얼리 브랜드가 참여한 트레이드쇼 공간을 마련하고 글로벌 백화점 체인 하비 니콜스를 비롯한 23개국 101명의 해외 바이어를 초청해 일대일 수주 상담을 유도했다. 또 글로벌 K팝 스타인 뉴진스를 홍보대사로 선정해 젊은 층의 주목도 끌었다. 매년 서울동대문플라자(DDP)에서만 진행했던 쇼를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에스팩토리에서도 일부 진행하면서 젊은이들의 성지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도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  「 ‘2024 F/W 서울패션위크’ 개막 원로 없이, 신진 디자이너만 가득 」    그런데 업계에선 이번 쇼 리스트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매년 꾸준히 쇼를 열었던 원로들의 브랜드 카루소(장광효)·이상봉·지춘희·빅팍(박윤수) 등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름도 낯선 신생 브랜드들이 절반 넘게 포진했다. 알아보니 이번에 쇼 참가 심사기준이 일부 바뀌었다. ‘해외 매출 실적’을 지난 시즌 10%에서 올해 20%로 올린 게 대표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패션위크가 글로벌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확실히 자리잡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서울패션위크 쇼에 참가하면 억대가 넘는 장소 대관비, 시스템(조명·오디오) 비용, 홍보를 지원받는다. 개인 사정으로 쇼 참가를 고사한 원로 디자이너도 있지만, 결국 이번 서울시 의도는 정량평가에 정성평가까지 더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트리트 패션을 메인으로 하는 신진 디자이너 위주로 밀어주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정부 지원 하나 없이 집 몇 채 값을 투자해 파리·뉴욕에 진출했던 원로들은 억울할 수밖에.   신인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만, 시가 주관하는 서울패션위크의 역할이 과연 비즈니스 활성화에만 있을까 의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 플랫폼이라면 어느 한 세대만을 타깃으로 하기보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패션 축제로 자리잡아야 하지 않을까. 편하고 개성 있는 스트리트 패션도 중요하지만 핏과 실루엣을 잘 살린 테일러드 슈트도 필요하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2030세대 옷만으로 건강한 패션 시장 형성은 어렵다”면서 “유럽의 명품들과 경쟁하면서 지켜온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역사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뿌리 없는 나무는 흔들리기 쉽다”며 “젊은 층 입맛에 맞춰 단기 실적 효과만 보려 하면 서울패션위크의 존재가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 지원사업이라면 응당 긴 미래 비전과 확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늘 시 주요 공무원들의 입맛에 맞춘 단기 목표만을 좇는다”면서 “서울패션위크가 신진 디자이너 창작지원 플랫폼으로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중견 스타 디자이너들이 서울패션위크에 소극적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공무원 특유의 뒤탈 없는 균등 분배 때문에 가능성 여부를 면밀히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지원금을 투자하는 방식은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서울패션위크는 신인만 좋아하는 경향이 커서 그 역할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불만의 이유다.   K패션 글로벌화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글로벌 패션위크 스탠더드에 맞춰 하이패션부터 스트리트 패션까지, 대한민국 다양한 층의 디자인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밀라노패션위크 기간 동안 올해 90세인 원로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패션쇼를 보러 가는 이유는 그가 지난해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탈리아 패션의 전설’이기 때문이다. 전통과 역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2024.02.03 00:32

  • [에디터 프리즘] 부활한 트럼피즘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지난 15일부터 닷새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한 각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은 단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가 오는 11월 5일 치러지는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CNN 등 외신들의 설명이다. 지난 2017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도 국제사회는 크게 술렁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슬로건 하에 미국이 그동안 추구해온 외교적 유산이 한꺼번에 부정당하는 상황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집권 당시 ‘미국 우선주의’를 근간으로 한 ‘고립주의’를 내세워 국제 이슈에 간섭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선 지금도 그는 여전히 고립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만약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물리친다면 국제사회는 또다시 트럼프가 제시하는 새로운 룰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  「 트럼프 집권시 ‘확장억제’ 유효할까 국제정세 변화 민감하게 대응해야 」    그 조짐은 벌써부터 감지되고 있다. 외신들은 트럼프의 부활을 가장 꺼려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핀란드와 호주를 꼽고 있다. 러시아와 1340㎞나 되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핀란드는 74년간 줄곧 중립국 지위를 고수하다가 지난해 5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개월 만이었다. 핀란드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와 군사적 대립이라는 리스크를 감내하면서까지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 배경에는 물론 나토의 핵심인 미국의 군사적 지원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 하지만 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떠벌리는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인해 그 신뢰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트럼프가 집권할 경우, 나토 가입에 역할을 했던 정치인들은 국내 정치에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미국과 함께 중국의 팽창주의에 맞선 호주도 낭패를 볼 상황에 빠졌다. 호주는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와 ‘오커스(AUKUS)’ 등에 가입해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해왔다. 이로 인해 양국은 호주산 석탄 수입이 금지되는 등 무역 전쟁까지 겪었다. 트럼프가 재집권해 미·중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이에 따른 호주의 역할이 모호해질 경우 호주는 지붕만 쳐다보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 트럼프의 재선을 가장 두려워하는 국가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다.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는 실제 지난 2018년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 내전 중인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경험이 있다.   이처럼 국제정세는 언제든 예기치 않게 돌변할 수 있다. 이런 환경 변화에 가장 적게 영향을 받는 나라일수록 국가 이익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무자비할 정도로 과감하게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이 그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이번 가자전쟁에서 보듯 최강 미국도 이스라엘의 고집 앞엔 속수무책이다. 실제 10년 넘게 장기집권하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부는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든 상관없이 철저히 자국 이익만을 강조하는 대외정책을 여러 차례 보여줬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노련한 정세 판단과 함께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들어서도 북한은 미사일 발사 등 다양한 군사적 도발로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간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확장억제’를 강력한 대북 억지 수단으로 강조해왔다. 백악관 주인이 바뀐다면, 바이든 시대에 통했던 룰이 그대로 트럼프에게 전수될 수 있을까. 혹시 모를 변화에 대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때다. 최익재 국제선임기자

    2024.01.27 00:10

  • [에디터 프리즘] '똘똘한 한 채'의 종말?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강남 아파트 1채 가진 사람과 시골 촌동네 주택 2~3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세금을 많이 내야 할까.   답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주택 가격이나 취득 시기 등을 고려해야겠지만, 현재는 집값보단 ‘주택 수’가 무거운 세금 부담을 결정 짓는 주 요인이다. 다주택 소유는 투기로 규정되며, 징벌적 세금이 매겨져서다.   그런데 새해 다시 시장이 변곡점에 섰다. 윤석열 정부가 지방 소멸에 대처하기 위해 다주택자를 활용하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내년 말까지 아파트 이외 소형 주택과 지방 미분양 주택을 추가로 구입하면, 주택 수 산정에서 제외해 세금 감면 혜택을 줄 계획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세컨드홈’ 활성화 정책이다. 기존 1주택자가 전국 89개 인구감소지역 주택 1채를 신규 취득할 경우 1주택자에게 적용하는 특례를 그대로 유지해주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산세·양도세·종부세 등에서 1주택자 특혜를 그대로 줄 테니, 지방 집 좀 사라”는 메시지다. 구체적 지역과 대상 주택 가격 등은 추후 발표될 예정이다.     ■  「 다주택자 중과세 규제 철폐 소멸 위험 지역 집 사면 특례 」    시장에선 이러한 ‘지방 구하기’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다소 어리둥절한 반응이다. 부동산 투자의 제 1원칙은 입지다. 심지어 ‘인구 수십만 이하’ 지역엔 접근을 자제하는 것이 부동산 투자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지방에 투자하라니, 그것도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에. 과연 세제 혜택을 받겠다고, 소멸 위험 지역의 투자에 나설까? 의구심이 적잖다. 그런데 이번 대책은 실효성과는 별개로, 시장에 던지는 울림이 묵직하다. 업계는 ‘다주택자 면죄부’를 주목한다. 그동안 투기꾼으로 억눌려온 다주택자의 숨통을 틔워주는 정책이 시작돼서다.   윤 대통령은 10일 ‘국민이 바라는 주택’을 주제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다주택자 규제를 완전히 바꾸겠다. 집값을 올리는 부도덕자라고 징벌적으로 중과세하는 것을 철폐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지난 정부와 180도 다른 노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를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양도소득세를 중과했다. 양도차익에 따라 6~40%인 기본세율에 2주택자는 10%포인트, 3주택자 이상은 20%포인트의 가산세를 매겼다. 취득세도 중과했다. 조정지역에서 2주택은 8%, 3주택 이상은 12%로 어마어마한 세금 철퇴를 휘둘렀다.   다주택자에 대한 이러한 철퇴는 시장의 패러다임도 흔들었다. 이때 등장한 신조어가 ‘똘똘한 한 채’다. 여러 채의 주택을 가져봐야 양도세 중과로 팔아도 남는 게 없으니, 가치 높은 한 채에 집중하자는 전략이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강남’에 방점이 찍혔다. 이는 상급지로 갈아타려는 수요를 가중시키며, 주택시장 양극화에 기름을 부었다.   시장 침체기, 지방의 비명이 커지면서 다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적폐로 몰렸던 다주택자는 혹한기의 ‘구원투수’로 다시 시장의 구애를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를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자유로운 재산권의 행사와 선택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정치와 이념에서 해방 시키고 경제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정부의 손짓에 시장이 얼마나 호응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임대사업자제도 등 시대에 따라 혜택을 줬다 뺐었다 하는 정책에 '반신반의'의 경계심이 상당하다. 다주택자 세금 부담 완화에 대한 국민 정서상 반감도 풀어나가야할 숙제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벌써부터 ‘똘똘한 한 채’의 종말(?)론이 피어나고 있다. 발빠른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실속 있는 지역별 2급지 리스트도 떠돌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본격 은퇴에 따라, 실거주 주택 외 월세 등 임대를 위한 주택 매수 수요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다주택자에 대한 개념이 전환되면, 투자 전략도 달라질 수 있어서다. 똘똘한 한 채가 주름잡던 주택 패러다임도 바뀔 수 있을까. 배현정 경제선임기자

    2024.01.20 00:10

  • [에디터 프리즘] 프로야구, 시간 끌지 “마!”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32년 동안 우승은 없지만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창의적인 응원문화는 챔피언 급이다. 내가 1980년대 후반 사직구장에서 경험한 건 ‘라이터 응원’이다. 야간경기 때 리더의 구호에 맞춰 관중이 일제히 라이터를 “촥” “촥” 켠다. 수천 개의 불꽃이 켜졌다 꺼지는 모습은 장관이다. 물론 경기장 내 흡연이 가능했던 시절 이야기고, 화재와 사고 위험 때문에 중단되긴 했다. ‘휴대폰 불빛 응원’의 원조 격이 아닐까.   다음은 ‘신문지 응원’이다. 깔고 앉아 있던 신문지를 잘게 찢은 뒤 구호나 노래에 맞춰 위아래로 흔든다. 단순하지만 상당히 스펙터클한 장면이다.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응원 도구로 활용한다’는 실용정신이 돋보인다. ‘봉다리 응원’도 있다. 주황색 쓰레기봉투에 바람을 넣어 머리 위에 뒤집어쓴다. 사직구장 관중석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키득거린다.     ■  「 시간단축 ‘피치 클락’ 도입 저울질 ‘분초사회’ 살아남으려면 결단해야 」    롯데의 최장수 응원 아이템은 2003년 등장해 22년 전통을 자랑하는 “마!”다.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면 롯데 팬들은 목청껏 “마!”를 외친다. ‘하지 마’와 ‘임마’의 중의적 의미인데 원정팀 투수는 상당한 위압감을 느낀다고 한다. “쫌”(창원 NC) “떽”(서울 LG)처럼 팀마다 ‘견제 응원’이 있지만 중량감은 “마!”에 미치지 못한다.   견제구를 던지는 건 1루 주자를 묶어놓음과 동시에 타자의 타격 리듬을 끊으려는 의도다. 견제가 반복되면 경기는 늘어질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KIA 타이거즈의 견제 응원이 “아야~, 아야~, 아야~, 날 새것다”일까.   어쩌면 올해 안에 “마!”를 포함한 견제 응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경기시간 단축을 위해 ABS(자동볼판정시스템)와 함께 메이저리그(MLB)에서 운영 중인 ‘피치 클락’을 도입하기로 해서다. ABS는 로봇이 볼-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것이고, 피치 클락은 투수가 정해진 시간 안에 투구해야 하는 규정이다. MLB는 ‘주자 없을 때 15초, 있을 땐 20초 이내’에 투구하도록 했고 이를 어기면 페널티로 ‘볼’ 하나를 부과한다. 주자 당 견제는 2회로 제한했다. 세 번째 견제에도 살아난 1루 주자는 자동으로 2루에 간다. 사실상 견제구를 던지지 말라는 뜻이다.   MLB 사무국은 경기 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풋볼(NFL)·농구(NBA)에 밀린 인기를 만회할 수 없다고 판단해 피치 클락이라는 초강수를 썼다. 효과는 즉시 나왔다. 지난해보다 경기 시간이 26분이나 줄어 2시간40분으로 떨어졌다. 경기당 평균 관중이 5% 늘었고, 시청자 수도 급증했다. 젊은 층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KBO리그의 평균 경기시간은 3시간10분대다. KBO는 지난 11일 “ABS는 올 시즌부터 실시하고, 피치 클락은 전반기 시범 운용을 해본 뒤 후반기부터 적용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시범 운용’이 무슨 뜻인지 KBO에 물었더니 “시계로 계측과 공개는 하되 페널티는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견제구에 대해서는 “허용 개수를 두 개로 할지, 페널티를 어떻게 할지 등은 더 연구해 보겠다”는 답을 내놨다. ‘ABS와 피치 클락을 동시에 시행하면 실전에서 큰 혼란이 올 수 있다’는 프로야구 종사자들의 목소리 때문에 반 발짝 물러선 느낌이다.   매년 다음해 소비 트렌드를 예측해 키워드를 발표하는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2024년 소비시장은 고객의 시간을 둔 쟁탈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분초사회’를 10대 키워드 맨 위에 올렸다. 돈보다 시간을 중요시하고 ‘가성비’보다 ‘시성비’를 따진다는 거다.   ‘시간을 끄는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KBO도 경기시간 단축을 위한 피치 클락 도입에 시간을 끌면 안 된다. KBO가 주춤댄다면 지난 연말 재선에 성공한 허구연 총재를 향해 “마!” “쫌” “떽” 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2024.01.13 00:08

  • [에디터 프리즘] 12층 김 여사님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김 여사님이 있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한 건물 미화원입니다. 미화원분들은 ‘여사님’이라고 불립니다. 김 여사님은 12층을 도맡습니다. 변기를 닦고 화장지를 갑니다. 휴지통을 비웁니다. 회사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말이죠. 여사님은 새벽 4시에 출근합니다. 그렇다면 1층, 2층부터 9층, 10층 다른 여사님들은요? “연신내에서 오는 분들은 나처럼 새벽 4시가 뭐야, 여유 있게 일하려고 새벽 2시에 출근해요”라고 그녀가 답했습니다. 지난해 11월 하순, 김 여사님과의 이 만남은 중앙SUNDAY ‘새벽을 여는 사람들’(2023년 12월 30일자 1면, 8~11면) 기획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푸시업 130번 80대, 오늘도 허탕 60대, 눈 탓 눈 못 붙인 50대…대한민국 새벽에 무슨 일이 10분에 1명, 쉴 새 없는 환자 행렬…“나 누군지 알아” 주취자 응대 진땀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막차와 첫 차 사이 4시간 쓱싹쓱싹…신도림역 우렁각시들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새벽 4시 꽉꽉 차는 노동자 버스…‘투명인간’ 아닌 ‘필요인간’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  「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소리소문 없이 묵묵히 할일 다해 」  연신내에서 오는 분들은 심야버스 N72번을 탑니다. 은평차고지에서 첫차가 오후 11시30분, 막차가 오전 3시25분입니다. 이 버스 막차 조금 뒤인 3시50분, 서울 상계동에서는 8146번 첫차가 출발합니다. 우린 그 버스에 올랐습니다. 또 다른 김 여사님, 박 여사님 등 여사님들로 꽉 찼습니다. 이들은 “이렇게라도 일하니 다행”이라고 하더니 곧 졸음에 빠져들었습니다. 인터뷰를 이어가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지난해 12월 20일 오전 5시 영동대교를 지나는 8146번 버스. 오전 3시 50분 상계동에서 출발해 강남역을 찍고 돌아가는 이 버스 첫차는 이미 4시 25분에 꽉 찬다. 승객 대부분이 강남의 빌딩에서 일하는 미화원들로, '여사님들의 버스' 혹은 '노동자들의 버스'라고도 부른다. 김홍준 기자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5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 음식점에 식자재 배달을 온 정규빈(32)씨는 ″전날 오후 11시에 경기도 시흥에서 출발해 50여 곳을 들르는 일이 이제 끝을 보고 있다″며 미소를 짓고 있다. 식자재로 가득했던 그의 트럭 적재함이 정말 끝을 보고 있었다. 김홍준 기자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바빴습니다. 동이 트기 전 기어코 일을 마치려 하거나, 새벽이 지나기 전에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정규빈(33)씨와 김흥배(76)씨처럼 말이죠. 정씨는 출근하는 음식점 사장님들보다 앞서 식자재를 원하는 곳(냉장실 몇 번째 칸 좌측 혹은 우측)에 정확히 갖다놔야 했습니다. 누군가와 통화라도 하는 걸까요. “이 새벽에 신문사에서 취재를 왔대”라고 건너편에 말했습니다. 김흥배씨는 “다른 사람이 폐지를 가져가기 전에 나왔는데, 경쟁자가 나타난 줄 알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김 여사님과 함께 출근하는 남편은 정년퇴직 뒤 다른 건물에서 일합니다. 이제 70세를 갓 넘긴 팔팔한 노인입니다. 윤동현(23)씨는 주말에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틈틈이 취업 공부를 하는 청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새벽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정년 연장과 청년 취업 사이에서 고민도 해봤습니다. 노인 문제, 자영업의 어려움에도 다가섰습니다.   대부분 사전 조율 없이, 길거리에서 부딪혀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갓 캔 고구마 같은 거친 ‘현장’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지요. “아니, 왜 자꾸 다가와요. 무서워요. 오지 마세요.”(대림역 첫 지하철을 기다리던 여성), “어디서 사진을 찍고 그래. 폰 줘 봐요. 기자? 얼굴만 나오게 하지 마쇼.”(남구로역 인력 시장의 남성)   눈이 내려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된 지난해 12월 25일 오전 3시 경기도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지점인 고양시 송포동에서 차만석(59)씨가 제설차량 점검하며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대한민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왔다 가고는 합니다. 차만석(60)씨는 취재 뒤인 지난해 마지막 이틀에도 새벽에 출동해 자유로의 눈을 치웠습니다. 연순옥(61)씨는 30분 만에 도로 엉망이 될망정, 오늘 새벽에도 신도림역 화장실을 박박 닦았습니다. 고양시의 쓰레기 수거 차량은 여전히 불 꺼진 아파트에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이라며 언급한 ‘투명인간’일까요.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4시, 환경미화 직원이불 꺼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해 12월 15일 0시 20분경 서울 신도림역에서 메트로환경 소속 직원이 취객이 남긴 토사물을 치우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타인의 노동 없이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없고, 나의 노동도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누군가의 노동도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 누군가가 사는 것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며 “그게 연대고, 사회 정의”라고 강조했습니다.   난(蘭)이 있습니다. 한 것이라고는 물만 준 것뿐인데, 몇 해를 거르고 얼마 전 꽃을 피웠습니다. 출장-휴가-출장으로 물 줘야 할 때를 3주 연속 놓친 뒤였습니다. 그 3주간 누가 돌봐줬을까요. 혹시? “여사님!” 노크를 하고 그녀의 작은 공간에 들어섰습니다.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습니다. 투명인간처럼요.   취재진 5명을 대표해 새벽에 씁니다.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rinrim@joongang.co.kr 김홍준

    2024.01.06 03:08

  • [에디터 프리즘] 민주적인가, 민주의 적인가

    박신홍 정치에디터 ‘인간적인가, 인간의 적인가.’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크리에이터’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AI)이 자체 진화를 거듭하더니 급기야 미국 대도시를 핵폭탄으로 공격하면서 인류와 AI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영화를 소개하는 한 줄의 카피였다. AI의 미래 정체성을 묻는 이 도발적 문구는 그렇잖아도 최근 챗GPT를 비롯해 AI의 급격한 확산에 남모를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는 대중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AI 전문가들도 하루가 다르게 강력해지는 AI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챗GPT를 만든 오픈AI 창업자 샘 올트먼이 지난달 전격 해고됐다 5일 만에 다시 복귀한 사건도 AI 규제 필요성을 둘러싼 ‘효과적 가속주의’와 ‘효과적 감속·이타주의’ 논쟁의 부산물이란 게 정설이다. AI에 대한 이 같은 낙관론과 비관·신중론의 극적인 충돌은 ‘의’자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는 영화 카피 문구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  「 실력 없이 사욕만 챙기려는 자인지 내년 총선 앞두고 꼼꼼히 따져봐야 」    주목할 건 이런 반전이 비단 AI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분야든, 어떤 사람이든 언뜻 보면 다 좋아 보이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긍정과 부정, 진실과 위선이 확연히 갈리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그 편차가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바로 한국의 현실 정치다. 실제로 말쑥한 이미지에 전문가적 역량을 갖췄다 해서 국회로 보냈더니 일은 안 하고 줄서기와 사리사욕 챙기기에만 혈안인 자들, 대접받는 걸 당연시하고 으스대며 자신을 뽑아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목도해 왔는가.   우리 주변에도 이런 ‘꼰대’가 얼마나 많은가. 권위주의적·독단적·군사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탓에 50~60대가 돼서도 여전히 20세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 여기에 개인의 권력욕과 인정 욕망이 더해지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청년·MZ세대가 기성세대를 꼰대 세대라 부르며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도 듣진 않고, 자기 말만 하며, 자신만 항상 옳다고 믿는 꽉 막힌 모습 때문이지 않겠나.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1위는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그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건 3위 ‘남우충수(濫竽充數)’다. 피리를 불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악사들 틈에 끼어 있다는 뜻으로, 실력 없는 사람이 재능 있는 체하며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세태를 풍자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이런 자들이 완장을 차거나 배지를 달면 사사로운 이로움에 눈이 멀 수밖에 없는 게 동서고금의 이치다.   이런 자를 골라내는 것, 이런 자는 더이상 국회에 보내지 않는 것, 이런 자는 국가의 주인인 우리 국민의 대리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거야말로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주권자인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기본명제다. 더 나아가 후보들의 성향과 발언, 과거 행적 등을 바탕으로 그가 과연 민주적인가 민주의 적인가, 의회주의적인가 의회주의의 적인가, 유권자들과도 소통 친화적인가 소통의 적인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할 때다. 이번에도 엉뚱한 사람 뽑아놓고 4년간 실망만 하는 악순환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29년 만에 감격의 통합우승을 차지한 LG 트윈스의 감독·선수·프런트는 이구동성으로 팬들의 성원과 응원 없인 불가능했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프로는 팬이 없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 정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의 지지 없인 사상누각에 불과한 게 정치다. 자신의 영달만 위해 국회 입성을 노리고 의원 배지를 또 하나의 전리품 취급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것, 그들이 민주적인지 민주의 적인지 판별해내는 것, 이는 오롯이 우리 유권자들의 몫이다.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2023.12.23 00:06

  • [에디터 프리즘] 정쟁에 묻힌 한국경제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최근 중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리면서 내년 세계경제 전망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당장 유가가 급락하면서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내년 세계경제가 올해와 비슷한 수준의 지지부진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국내외 주요 기관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기존 2.4%에서 2.2%로 0.2%포인트 내렸다. 한은은 2.2%에서 2.1%로, 한국개발연구원(KDI)는 2.3%에서 2.2%로 각각 0.1%포인트씩 낮췄다. 수치상으로는 올해(성장률 전망치 1.3~1.4%)보다 낫지만, 국민이 체감하기는 힘들 것이란 분석이다.     ■  「 AI 기본법, 기업 구조조정법 등 정쟁 볼모로 잡혀 처리 미뤄져 」    이 같은 답답한 경제 환경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본지가 경제·경영 학계,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금융시장 전문가 등 경제 전문가 41명을 대상으로 지난 주 실시한 설문조사(관계기사 4~5면)에서 전문가들은 가장 시급한 경제 정책 과제로 ‘수출 재정비와 신산업 진흥’(31.7%)을 꼽았다.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반도체처럼 한국경제를 끌어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수출도 그렇지만 신산업 진흥은 정부나 기업 의지로만은 할 수 없다. 관련법상 근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지원을 뒷받침해야 기업도 투자를 하고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려면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회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밥그릇을 지킬 수 있을지 골몰하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민생법안은 물론 상대적으로 전문영역에 있는 경제·산업 관련 법안까지 묻히고, 사라지고 있다.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보관 시설 마련의 근거를 담고 있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은 물론 ‘인공지능(AI) 기본법’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도 기약이 없다. 고준위 특별법은 연내 처리하지 않으면 멀쩡한 원전까지 멈춰 설 수 있지만, 여야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야의 원전 정책 방향성이 다르니 차치하더라도 AI 산업 육성을 위한 AI 기본법, 기촉법까지 진척이 없는 건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 법안은 정부와 국회 모두 법안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정쟁의 볼모로 잡혀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기촉법은 회생절차(법정관리)에 비해 신속하게 한계기업을 구조조정할 수 있는 ‘기업 재무구조 개선 작업’(워크아웃)의 근거인데, 법안이 일몰된 탓에 대유위니아그룹 등 한계기업의 워크아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상장사 가운데 한계기업 비중은 2017년 9.2%에서 지난해 말 17.5%로 2배가량 늘었다.   8일 전기차 등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미래차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발의한지 2년 만이다. 경제 정책은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뒷북치는 정책으로는 시장을 선점하기는커녕 시장에 진출해 경쟁하기도 버겁다. 며칠 전 상임위를 통과한 우주항공청 특별법이 대표적인 예다. 4월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이후 국회에서 8개월 가까이 공전하다 겨우 상임위를 통과했지만, 연내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사이 미국·중국 등 우주항공 분야 선도 그룹은 물론 인도와 같은 후발주자까지 달 남극 착륙에 성공하는 등 우리와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그나마 여야가 최근 ‘2+2 협의체’를 가동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지만, 실제 결과물이 나올지는 미지수지다. 여야는 올해 초 경제와 기업을 살리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예산안, 이른바 ‘쌍특검’을 두고 극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를, 기업을 살리겠다는 공언은 결국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지켜보는 기업은 속이 타들어 간다.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2023.12.09 00:06

  • [에디터 프리즘] 삼성 축구단이 2부리그로?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한국 프로축구(K리그)는 프로야구(KBO리그)와 달리 ‘강등-승격’ 제도가 있다. K리그1(1부리그) 하위 팀과 K리그2(2부리그) 상위 팀이 매년 자리를 맞바꾼다. KBO리그가 축제 분위기로 가을야구(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동안 K리그에서는 시즌 막판 살벌한 ‘단두대 매치’가 벌어진다. K리그1 최하위(12위)는 다음 시즌 2부로 자동 강등되고, 11위는 2부 2위, 10위는 2부 3~5위 플레이오프 승자와 각각 맞대결을 벌여 이긴 팀이 1부에 남는다.     ■  「 1부 최하위, 강등 현실로 다가와 모기업 의존 벗고 자생력 키워야 」    지금 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팀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다. 지난해 10위였던 수원 삼성은 2부 안양 FC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스코틀랜드로 떠난 오현규(셀틱)의 연장 후반 결승골 덕분에 간신히 강등을 면하고 잔류한 바 있다. 올해도 ‘승강 플레이오프행’이 확정됐는데, 더 딱한 건 자동 강등을 걱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원 삼성은 2경기만을 남긴 K리그1에서 최하위(승점 29)에 머물러 있다. 25일 라이벌 FC 서울의 홈에서 원정경기를 치르고, 12월 2일에는 11위 강원(승점 30)과 최종전을 벌인다. 1995년 창단한 수원 삼성은 리그 우승 4회, FA(축구협회)컵 우승 5회,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등 찬란한 업적을 쌓아 왔다.   ‘일등주의’를 표방했던 삼성 스포츠단에서 ‘꼴찌’는 익숙한 단어가 됐다.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는 2022~23 시즌 14승 40패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최하위를 했다. 올 시즌도 8연패를 당하는 등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프로배구 V리그 8연속 우승에 빛났던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역시 최하위로 지난 시즌을 마감했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도 형편은 비슷하다. 2011~15년 정규시즌 5연속 1위(한국시리즈 4연속 우승)를 했던 ‘왕조’ 삼성의 올해 성적은 8위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순위는 9-9-6-8-8-2-7위다.   삼성 스포츠단의 성적 부진은 당연히 투자 축소 때문이다. 독립법인으로 운영되거나 각 계열사가 운영하던 스포츠 팀의 관리 주체가 2014년부터 제일기획으로 통합됐다. 더 이상 큰돈을 들여 ‘1등 스포츠단’을 유지하는 게 명분도 실리도 없다고 삼성은 판단했다. 예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이게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17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정유라 승마 지원’으로 뇌물 혐의를 받아 구속되고 옥고를 치렀다. 삼성스포츠단 임원 출신인 A씨는 “그 사건을 계기로 삼성은 ‘도와주고도 욕먹고 벌 받는’ 스포츠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의 ‘스포츠 사랑’은 고(故) 이건희 회장 시절 절정이었다. 고교 때 레슬링 선수로 뛰었던 이 회장은 16년간(1982~97)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았다. 그 시절 한국 레슬링은 올림픽 금메달을 쏟아냈다. 이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프로 종목뿐만 아니라 육상·탁구·배드민턴 등 삼성이 손을 대는 아마 종목마다 지원도 성적도 일등이었다.   풍요로운 시절은 가고 삭풍이 부는 겨울이 왔다. 충성도 높기로 유명한 수원 삼성 서포터들은 “이 따위로 지원하려면 차라리 매각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삼성이 ‘계륵’으로 여기는 축구단을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는 냉정하게 매각하고 손을 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매각되든, 2부로 떨어지든, 1부에 잔류하든 ‘삼성 축구단’은 체질을 확 바꿔야 한다. 대기업 산하 스포츠단도 모그룹만 쳐다보는 의존성을 버리고 자생력을 갖춰야 생존할 수 있다. K리그 2연속 우승을 거둔 울산 현대는 모그룹(현대중공업) 지원을 빼고도 올해 100억원이 넘는 마케팅 수입을 올렸다. 포스코의 지원이 해마다 줄고 있는 포항 스틸러스도 FA컵 우승으로 저력을 보여줬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2023.11.25 00:06

  • [에디터 프리즘] 오늘도 평화로운 한강공원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   토요일인 지난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근처 자전거도로 교차로. 샛강 쪽으로 돌아 들어가려는데 한강대교 방향에서 10여대의 자전거가 미친 황소 떼처럼 달려든다. 소위 ‘사이클’이라 불리는 로드 자전거다. 선두의 두어 명이 무어라 소리를 치는데 아마 비키라는 소리 같다.   “야, 이 개××들아!”   앞에서 가던 남성이 사자후를 토한다. 급정거하느라고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헬멧에 고글, 쫄쫄이바지까지 차려입고 떼거리로 달리던(팩 주행이라 부른다) 일행 중 뒤를 따르던 한 남성이 고개를 들고 “뭐, 이~”라고 대거리를 하려다가 그냥 지나간다. 빠른 주행으로 숨이 차서 말을 잇지 못한 듯싶다.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고 한강공원 자전거도로에는 다시 평화가 드리운다.     ■  「 안전속도 무시하는 자전거 폭주족 언제까지 시민 위협 두고 볼 건가 」    사고 위험이 큰 회전교차로에서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정상이다. 자동차 도로와 마찬가지로 먼저 진입한 자전거가 있으면 당연히 멈춰야 한다. 게다가 한강 자전거도로의 권장속도는 시속 20㎞ 이하다. 누구라도 다른 시민들에게 위협의 가하며 먼저 지나가겠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게다가 페달링을 멈추는 기색조차 없이 비키라고 소리 지르는 것은 예의도 아니다.   “사십, 사십!!!”   한 시간쯤 뒤 이촌 한강 공원 자전거도로. 앞에 지나는 따릉이를 왼쪽으로 추월하려는 참에 중앙선 넘어 왼쪽으로 질풍이 스친다. 또 다른 팩이다. 중앙선을 넘어 질주하는 모습에 마주 오던 시민들이 깜짝 놀라 속도를 줄인다. 10여대의 행렬 맨 뒤에 따라가던 라이더가 소리를 지른다. 평균 시속 40㎞를 달성했다는 뜻인지, 40㎞를 유지하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것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나들이 나온 가족과 이른바 ‘샤방 라이딩(자전거를 낮은 속도로 슬슬 타는 것)’을 즐기는 연인 등이 뒤섞여 북적이는 주말 한강 자전거도로에서 폭주족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지난 9월까지 한강 공원에서 발생한 자전거 안전사고는 471건이다. 주말마다 두 건씩 사고가 난 셈이다. 이중 과속 때문에 발생한 사고가 48.2%로 절반에 육박한다. 집계되지 않은 경미한 사고까지 합치면 자전거를 타는 시민이 한두 번씩 아찔한 경험을 할 확률은 매우 높다.   서울시는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자전거도로 곳곳에 ‘20’이라는 안전속도를, 통행이 잦은 횡단보도 근처에는 ‘보행자 우선’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지난 8일에는 종합 개선책을 내놨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CCTV 40개를 뚝섬·이촌·망원 등 한강 공원에 설치해 과속을 단속한다. 보행자 통행이 잦은 횡단보도 반경 100m 이내는 속도를 10㎞로 제한하고 과속방지턱 등을 도입할 방침이다.   이런 처방이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AI CCTV로 폭주족을 발견해도 대응책은 “안전속도를 준수하라”는 안내 방송을 하는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과속을 단속하거나 처벌할 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 측은 “자전거도로 일정 구간에서 시속 20㎞ 이내로 속도를 제한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을 연내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다섯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 온통 정신이 팔린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관심이나 보일지, 법이 개정돼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설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월 1회 이상 자전거를 이용하는 인구는 1340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찬바람이 불고 자전거도로가 한산해지면 안전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식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이 되면 똑같은 광경이 되풀이될 것이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보고서 한 줄로 마무리되던 소설(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결말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풍경 아닌가.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2023.11.11 00:06

  • [에디터 프리즘] 여의도의 문단속

    박신홍 정치에디터 올해 영화계에서 당초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한 영화로는 ‘스즈메의 문단속’이 단연 첫손에 꼽힌다. 한국 관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은 재난 3부작의 최종편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인 스즈메가 규슈부터 고베·도쿄·도호쿠까지 과거 큰 재난을 겪었던 지역을 돌며 재난의 문을 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문을 닫는 영화’인 셈이다. 감독은 이 순례의 과정을 통해 재난의 아픔을 딛고 치유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고, 여기에 감독 특유의 서정적인 비주얼이 더해지면서 보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무려 555만 명이 극장을 찾은 가운데 올해 흥행 순위에서도 ‘범죄도시3’ ‘엘리멘탈’에 이어 당당히 3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  「 스즈메는 문을 닫아 재난 막았지만 선거에선 문을 열어야 승리하는 법 」    문단속은 최근 포스트시즌이 한창인 프로야구에서도 큰 화두 중 하나다. 아무리 8회까지 앞서 있어도 9회 마운드에 오른 세이브 투수가 역전을 허용하면 한순간에 패하고 마는 게 야구다. 더욱이 144경기를 치르는 정규시즌과 달리 3~4승으로 1년 농사 성적표가 좌우되는 플레이오프에선 단 한 번의 역전패가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어느 감독이든 가장 구위가 좋고 강심장인 투수에게 9회 마무리 문단속을 맡기는 이유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게 다 좋게 받아들여지는 건 인생도, 야구도 매한가지다.   여의도 정치권도 문단속에 한창이다. 문제는 최근 여의도의 문단속을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집토끼 단속에만 혈안인 게 치명적 허점이다. 보수·진보·중도층이 각각 30%대로 삼분화돼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간단히 산수를 해봐도 집토끼만 챙겨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옴에도 여든 야든 강성 지지층에만 의지한 채 선명성 경쟁만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선 아무리 문단속을 한들 여기저기 사방에 뚫린 구멍으로 민심이 계속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여야 모두의 비호감도가 60%를 넘나들고 정당 지지율도 30%대에서 좀처럼 치고 올라가지 못한 건 여야 고정 지지층을 제외하곤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중도층이 정치권 전체에 등을 돌린 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자동차가 마주 달리는 치킨 게임처럼 사생결단으로 맞붙는 한국의 극단적인 정치 현실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던 유권자들마저 ‘호의가 계속되니 당연한 권리인 줄 착각하는’ 정치권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재난이나 야구는 문단속이 중요하지만 정치는 문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문을 열어놔야 새로운 지지층을 흡수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야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환기가 되지 않은 방에 3년 넘게 갇혀 있는 유권자들은 퀴퀴한 냄새에 얼마나 화가 치밀어 있겠는가. 다음 총선에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겠는가. “선거는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라는데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의 심판이 어디로 향할지는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경제가 시장을 이기지 못하듯 정치는 민심을 이기지 못한다. 강을 버려야 바다가 되고 꽃을 버려야 열매가 되듯 한국 정치도 문단속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편견과 관습부터 버려야 비로소 정상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선 문을 닫아야 재난을 막을 수 있었지만 여의도의 문단속에선 반대로 문을 최대한 열어둬야 더 큰 재난을 피할 수 있다. 선거는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의 문, 포용의 문을 ‘먼저’ 여는 쪽이 늘 승리해 왔다. 내년 총선도 예외가 아니다.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2023.10.28 00:06